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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파기 깊이가 어느 정도 있는 구간에서는 흙막이 가시설 없이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주변 지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벽을 세우고, 그 벽이 밀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구조를 먼저 만들어야 그 안에서 사람도, 장비도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습니다. 26년 현장 생활 중에서도 흙막이는 눈에 잘 안 띄지만 사고가 나면 가장 크게 나는 공종 중 하나라, 항상 긴장하고 다뤘던 부분입니다.
엄지말뚝과 토류판, 가장 일반적인 흙막이 방식
엄지말뚝(H형강을 지반에 항타하거나 삽입해서 세우는 말뚝)을 먼저 일정 간격으로 박아 흙막이의 뼈대를 세우고, 굴착이 진행되는 만큼씩 그 사이에 토류판(나무나 강재로 만든 판)을 끼워 넣어 흙을 막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흙막이 공법입니다. 엄지말뚝의 간격과 근입깊이(지반 속으로 박아 넣는 깊이)는 굴착 깊이와 토질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걸 얕게 잡으면 굴착이 깊어질수록 말뚝이 밀리는 위험이 생깁니다. 토류판은 굴착 깊이를 따라가면서 한 단씩 끼워 넣어야 하는데, 이 순서를 지키지 않고 미리 깊게 파놓으면 그 사이 흙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저는 항상 굴착과 토류판 설치를 한 세트로 묶어서 진행하도록 합니다.
쉬트파일, 교량 주변에서 주로 쓰는 이유
교량 교각이나 교대 주변처럼 지하수위가 높거나 하천에 인접한 구간에서는 엄지말뚝과 토류판 방식보다 쉬트파일을 주로 씁니다. 2024년에 개정된 국가건설기준센터의 「가설흙막이 설계기준(KDS 21 30 00)」과 「가설흙막이 공사(KCS 21 30 00)」에서는 이 공법을 강널말뚝(steel sheet pile)이라고 부르는데, 흙막이 공사에서 토압에 저항하는 동시에 서로 맞물리는 이음 구조를 통해 차수(물을 막는) 목적까지 겸하는 수직형 강재 널말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엄지말뚝과 토류판은 판과 판 사이에 틈이 생길 수 있는 구조라 물이 스며들기 쉬운데, 쉬트파일은 강판끼리 이음부가 맞물리면서 연속된 벽체를 이루기 때문에 차수 성능이 훨씬 좋습니다. 다만 교량 주변이라고 무조건 쉬트파일을 쓰는 건 아닙니다. 지반이 어떤지, 지하수위는 높은지, 주변에 뭐가 있는지 보고 그때그때 정합니다. 다만 물 관리가 중요한 교량 주변에서는 아무래도 쉬트파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첫 현장이었던 KTX 차량기지에서 교량 교각 가시설 작업을 할 때가 딱 이런 경우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광파기로 측량하던 시절이었는데, 버팀보 위로 올라가서 기준점을 아래로 내려 바닥 기초 측량을 해야 했습니다. 버팀보 위라는 게 꽤 높은 곳이라,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그 작업 자체를 아예 못 했습니다. 저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네요. 지금은 GPS측량기를 많이 사용하지만, 교각처럼 깊게 터파기를 한 구간은 주변 흙막이 벽체와 굴착 형상 때문에 위성 신호 확보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구간에서는 기준점을 광파기로 내려서 바닥 측량을 하는 방식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버팀보, 흙막이 벽이 무너지지 않게 받쳐준다
버팀보는 흙막이 벽(엄지말뚝이든 쉬트파일이든)이 흙의 압력에 밀리지 않도록 안쪽에서 받쳐주는 지지 구조입니다. 굴착이 깊어질수록 벽에 가해지는 토압도 커지기 때문에, 굴착 단계에 맞춰 버팀보를 순차적으로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후에는 프리로딩(버팀보에 미리 하중을 도입해서 벽체 변위를 최소화하는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을 생략하면 버팀보가 실제로 힘을 받기 전까지 벽체가 먼저 밀리는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무에서 이 버팀보 때문에 골치 아픈 상황이 자주 생깁니다. 구조물 벽체를 시공할 때 버팀보 위치와 철근 배근이 겹치면 철근을 설계대로 배치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벽체를 한 번에 끝까지 시공하지 못하고, 버팀보 하부까지 먼저 콘크리트를 타설한 뒤 충분한 강도가 확보되면 되메우기를 진행합니다. 이후 흙막이 구조 검토와 해체 순서에 따라 버팀보를 제거하고 남은 상부 벽체를 시공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도면만 봐서는 공정표에 잘 안 잡힌다는 겁니다. 버팀보 설치, 철근 배근, 콘크리트 타설, 되메우기, 버팀보 해체가 서로 맞물려 있어서, 저는 흙막이 구간 벽체 공정을 짤 때 이 부분을 항상 별도로 감안해서 여유 기간을 잡아둡니다.
흙막이 계측관리, 방심하면 사고로 이어진다
흙막이도 앞서 절토 사면 안전관리에서 다뤘던 계측관리와 같은 원리로 관리해야 합니다. 벽체에 작용하는 토압이나 변위는 육안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경사계나 하중계 같은 계측기를 설치해서 지속적으로 수치를 확인합니다. 같은 KDS 21 30 00 기준에서도 굴착 시 정기적인 계측관리 실시를 명시하고 있고, 굴착 깊이가 20m 이상인 대규모 흙막이 공사는 선행 굴착 단계에서 측정한 실측값을 활용해 다음 단계의 안전성을 예측하는 역해석기법을 적용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계측값이 관리기준에 접근하거나 이상 변위가 확인되면 즉시 원인을 분석하고, 현장 계측관리계획과 안전관리 절차에 따라 작업 지속 여부와 보강 필요성을 검토해야 합니다. 특히 굴착 진행이나 버팀보 설치·해체처럼 흙막이 구조계가 바뀌는 단계에서는 계측값의 변화 추이를 더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합니다.
엄지말뚝과 토류판이든 쉬트파일이든, 흙막이는 결국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특히 버팀보와 철근이 얽히면서 생기는 시공 순서 문제처럼, 도면에는 안 보이지만 현장에서는 반드시 부딪히게 되는 디테일들을 미리 알고 공정을 짜는 게 결국 공기 지연을 줄이는 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터파기 지하수위 대응을 다뤄보겠습니다.